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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삶[국내]

말하는 종이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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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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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 유럽의 몇몇 선교사들이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 에스키모인들은 추하고 더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전적이고 잔인하였다. 그들은 그들끼리 사랑의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5년여 동안 열심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으나 그들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절만 하였다.

어느 날 성서를 번역하고 있는 존, 벡이라는 선교사집에 에스키모인들이 몰려와 문을 걷어차며 들이 닥쳤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적개심이 발로 되었다 생각하여 그 선교사는 순교를 각오하였다. 테이블 주변에 모여든 그들은 펜, 잉크, 그리고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들 가운데 카야르낙이란 자가 물었다. “이것이 무어요?”

존 선교사는 흰 것은 종이요 종이에 그려진 검은 표시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과 똑같은 말(글)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종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카야르낙은 퉁명스럽게 종이를 불쑥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종이가 말하게 해보시오! 우리가 보는 데서…빨리 하시오.”

선교사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선교사는 좋은 생각을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종이를 훑어보다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번역된 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읽어가다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신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잠깐 쉬었다. 그때 존 선교사는 카야르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의 얼굴은 침울해 있었고 그의 볼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종이가 더 말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존 선교사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카야르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후에 남은 성경을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와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낼 정도로 찔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히 4:12)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라 없는 사람이요, 부모 없는 고아라고 어느 분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들보다 부모가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불쌍하다고 생각된다.

지난달 성서사업의 일환인 찬조회원 모집 차 부산엘 갔었다. 특히 이번 방문 기간 중에는 상애원교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상애원교회는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용호동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음성 나환자들이 사는 상애원 마을교회다. 담임목사인 이만규 목사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아 피곤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 한 마디라도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

난민들을 위한 시영주택단지를 돌아 숲이 우거진 언덕을 넘어 돌아서자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이국적인 느낌까지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닭소리 때문에 이야기를 주고 받는 데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건축된 지 퍽 오래된 듯한 교회에서는 벌써부터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의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실에서 잠깐 쉰 뒤에 단에 올라섰다. 싸한 기분이 목 언저리에 감돌면서 오래전 어느 병원 시체실에서 맡았던 악취가 떠올랐다. 성가대석과 장로님들 좌석을 제외하고는 그냥 마룻바닥이었다.

나는 사회하시는 이 목사님에게 주보 한 장을 달라고 하였다. 이 목사님은 이교회는 주보가 없단다. 육백여 명이 넘는 교회에 왜 주보가 없느냐고 반문했더니 주보를 인쇄하면 한 달에 약 6,000원 가량이 지출되는데 그것을 절약해서 복음사업에 쓰자고 당회에서 결의하여 부산기독교 방송국에 헌금하고 있단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예배가 시작되고 이층까지 꽉 들어찬 교인들을 보자 한국 초대교회가 연상되었다. 찬송이 시작되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둥병으로 아래턱이 떨어진 장로님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잇몸을 움직이며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붙은 손바닥을 치며 열심히 찬송 부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돋보기 위에다 또 돋보기를 쓰시고 확대경을 손에 드신 장로님이 찬송가와 눈의 거리를 5센티 정도로 가까이 하여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이 장로님도 손가락이 모자랐다.

설교를 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도저히 성서사업에 협조해달라고 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설교가 끝나자 나는 그들에게 기도해주십사라는 부탁으로 말을 맺었다. 예배가 끝나자 이 목사님께서 꼭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가라고 부탁을 하여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기로 하였다. 다른 교회와는 달리 저녁예배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저녁시간에도 거의 낮 시간과 같은 수의 집회였다. 나는 그들의 열심에 감동되고 그들의 분위기 속에 휩싸여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외침을 외쳤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께서 특별히 성서반포사업에 참여하자는 권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부모가 있어도 만나지 못하며 아이들도 학교 갈 나이가 되면 격리시켜 기숙사에서 공부하게 하는 그들 중에서 80여 명에 달하는 회원이 생겼다. 멀리서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 자식을 품에 두지 못하는 그들, 그러나 내 민족의 살길이 말씀에 있으니 말씀사업에 협조하겠다는 그들, 성서공회의 발전과 공회의 직원들을 위하여 특별히 통성 기도하던 눈썹 없는 형제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출처: <성서한국>1973년 10월 31일 19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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