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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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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12-11 11:15 조회1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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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뇨 

 

그리스어: kyrenios 

뜻: ‘구레네 출신자’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구레뇨는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와 디베료(티베리우스) 치하에서 중요한 관직들을 맡았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져 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눅 2:1-2).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사건들이 이미 헤롯 대왕의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현대 역사가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좀 더 오래된 자료, 예를 들어 타키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스트라보 등의 자료를 보면, 한결같이 헤롯 대왕이 기원전 4년, 곧 구레뇨가 시리아(수리아)의 총독이 되기 대략 10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다만 요세푸스는 로마의 인구 조사가 구레뇨 재직 초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구레뇨는 기원전 51년에 태어나 로마 군대에서 그의 인생행로를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기원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 참가했을 것이다. 이 해전은 아구스도의 승리로 끝났으며 구레뇨는 그 다음 10년을 스페인에서 복무했다. 기원전 14년에 그는 크레타와 키레네의 로마 총독이 되었는데, 그는 거기서 마르마리카 족속으로 알려진 광야의 노략자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는 로마의 원로원이 되었다. 기원전 6년에 구레뇨는 밤빌리아-갈라디아 지방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로마 제국의 화약고와 같은 곳이었다. 그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원정에서 여러 번 성공하여 로마로부터 명예와 관직을 얻었다. 기원후 2년에 그는 황제 아구스도의 손자인 가이우스 시저(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수석 자문관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아구스도의 양자 디베료가 황제 지위의 합법적 상속자로 부상했을 때 구레뇨는 디베료의 진영으로 옮겨갔다. 기원후 6년에 구레뇨는 시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그의 권한 영역에는 유대 땅도 들어 있었다. 당시 유대 땅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폭정으로 온갖 미움을 받던 헤롯 아켈라오가 아구스도 황제에게 쫓겨난 후였다. 아구스도가 죽고 기원후 14년에 디베료가 황제가 되자 구레뇨는 다시금 로마에서 디베료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 기원후 21년 구레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성대한 장례식이 공개적으로 치러졌다. 이 사실은 그가 마지막까지 디베료의 호의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인구 조사가, 시리아에서 구레뇨의 활동 초기인 기원후 6, 7년에 실시되었던 인구 조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선임자인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의 통치 아래 실시되었던 인구 조사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사투르니누스의 인구 조사는 기원전 9년 혹은 기원전 6년에 실행되었다. 구레뇨가 이미 시리아 총독의 자리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누가복음에서 총독의 이름을 실수로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당시의 비문도 있다고 한다.


 

▲ 구레뇨(눅 2:1-2)가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여행했다. 

세르비아의 깔레니치(Kalenic) 수도원에 있는 프레스코 그림(15세기).

 


출처: Deutsche Bibelgesellschaft, ed., Die Menschen der Bibel: Ein illustriertes Lexikon der Heiligen Schrift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4), 335 중에서(편역: 김창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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