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공보 연재] 기막힌 그 말씀 (7) "사람이 무엇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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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8-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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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기독공보」 인터넷 판 2025년 8월 14일자에 게재된 연재물 [기막힌 그 말씀] <7>(https://pckworld.com/article.php?aid=10758177340)을 한국기독공보사의 허락을 받아 옮겨 적은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그를 기억해 주시며, 인간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새한글성경 시 8:4) 오래전, 달빛 환하고 별빛 찬란한 밤하늘을 쳐다본 신앙인(3절)의 입에서 터져 나온 감격스러운 고백입니다.
'인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 '벤아담'은 그 자체로 '사람의 아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개별 인간을 뜻한다고 최신 구약 히브리어 사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저 사람들을, 인류를 뭉뚱그려 기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신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5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님은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게 하셨습니다. 영광스러움과 존엄함이라는 왕관을 그에게 씌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 하나하나를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게 하셨다니요! 엄청납니다. 너무나 황송스럽습니다. 기막힌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하나하나를 임금처럼 높여 주셨고, 영광스럽고 존엄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영광스러움과 존엄함이라는 왕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이 이처럼 높이신 까닭을 두고서는 6절에서 노래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주님 두 손으로 만드신 것들을,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온 창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을 더할 나위 없이 높이시고 돌보아 주셨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온누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돌보도록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는 정도로까지 높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 26-2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와 닮은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 땅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온갖 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닮은 모양으로 만드셨다고 함은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을 대리하여 온 누리를 다스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라고 주석가들은 풀이합니다. 하나님을 대리할 존재이니 그 위상이 참으로 크게 높여진 것 아닌가요?
창조 세계를 바라보며 이런 깨달음에 다다른 시인은 시편 8장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오, 여호와 우리 주님, 얼마나 힘이 강하신지요. 주님 이름이 온 땅에서!"라고 목청껏 외칩니다.
오늘 이런 시편의 말씀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 덕택에 사람이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따라서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 덕택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존엄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성별, 나이, 인종, 혈통, 국적, 직업, 능력, 학력, 경력, 지위, 업적, 생김새, 성격, 건강상태, 강점, 약점, 심지어 종교가 어떠하든 우리는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게 하신 존재입니다. 그처럼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인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함부로 막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나를 내가 어찌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하나님 덕택에 영광스럽고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사람의 존엄성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창조주를 믿고 섬기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마구 대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때 가슴 아파합니다. 그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용감히 나섭니다.
제가 신학생이던 1970년대 중반의 일이 떠오릅니다. 시내에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광장동 생활관으로 돌아오려고 버스를 타고 오던 중이었습니다. 복잡한 버스 앞부분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갑자기 버스 뒤쪽이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여자 청년을 희롱하는 건장한 남자를 어떤 어른이 호되게 꾸짖고 계셨습니다. 누구신가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신학교 교수님이 아니셨겠습니까! 평소에는 온화한 모습으로 어린 학생들에게도 깍듯이 높임말을 쓰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못 본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교수님은 거침없이 그 남자를 야단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약성서 히브리서 2장 6~8절에서는 맥락을 달리하여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시편 8장 4~6절을 이끌어 씁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그를 기억해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라고 주님이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이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추셨지만, 영광과 명예라는 왕관을 그에게 씌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시편을 이렇게 인용하면서 번역이 조금 달라진 까닭이 있습니다. 신약 그리스어 성서 히브리서 2장 6~8절에서는 이 시편의 말씀을 히브리어 성서를 최초로 외국어로 번역한 구약 그리스어 성서(전문 용어로는 '칠십인역'이라고 부릅니다)에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를 몰랐던 유대인들이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칠십인역'으로 구약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아무튼 히브리서의 이 말씀도 시편의 맥락에서 다시 읽어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뒤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움과 존귀함의 왕관을 씌워 주신 뜻을 따라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갑니다. 그 길을 앞장서서 가신 주님을 그렇게 따라갑니다.
박동현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은퇴, 새한글성경 구약 책임 번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