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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신앙의 초석을 놓으신 향정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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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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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 목사가 1882년에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국내에 들어와서 보급되면서 최초로 생긴 교회가 소래교회이다. 그 교회에 출석하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신 김향정 할머니의 삶을 그 손녀이신 장현심 할머니의 글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다.
나의 친할머니, 김향정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들여오신 분이시다. 옛이야기가 구전되듯이 할머니의 얘기는 지금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된다. 186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18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실 때 이름이 없이 그냥 김 씨였다. 그러다가 향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던 동네에서 오셨다하여 향정(香井)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
할머니는 결혼한 지 13년만인 1894년에야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다. 가산은 많았지만 자손이 귀했던 집안에 우리 아버지가 태어남으로 다시 활기를 찾은 셈이다. 증조부는 종이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사셨다. 전통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숭배하고 선비로서의 체모를 지킨 분이시다. 고을에 원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면 의례히 증조부를 찾아와 예를 표하였다.
할머니는 종부로서 사방 삼십 리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는 넓은 농토와 대소가를 거느리고, 기제사와 사대봉사를 받드느라 하루 종일 바빴었다. 평상시에도 제사가 있을 때에는 동네의 일가아낙네들이 모여 제사를 도왔다. 그 절정은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초상을 치르는데, 일주일 내내 온 동네가 밥을 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밥을 먹으며 일을 하였다고 한다. 없는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느라 집안이 망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독자이신데 할머님 당신이 돌아가시면 똑같은 일을 아들 며느리가 고스란히 물려받아 평생을 조상치다꺼리만 하다가 말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셨다고 한다.
야소교를 믿으면 조상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것을 믿기만 하면 적어도 당신의 제사는 안 지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솔내교회를 당신발로 찾아가셨다. 초가로 지은 집이었는데 당시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던 시절이어서 내외를 했다. 야소교에선 금하는 것이 여럿 있었다. 우선 담배를 끊어야 했다. 술과 투전도 금하고, 축첩을 금했다. 금지사항이 모두 할머니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다.
교회에 들어가는 초가 담벼락 초입에는 장죽들을 죽 세워놓았다. 담배를 미처 끊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 세워둔 것이었다. 예배당은 두 칸으로 지어졌는데 한 칸은 여자, 한 칸은 남자가 앉는 장소였다. 설교는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했다. 가운데는 벽이 있고 그 벽 위쪽엔 네모진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곳을 통하여 여자들은 설교를 들었다.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교회를 다녔다. 초대교회에서 하던 대로 성경을 글자그대로 실천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그대로 사느라 주일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외출도 하지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십 리 떨어진 교회에 주일예배를 보기 위하여 할머니는 토요일에 달구지를 타고 집을 나섰다가 주일을 보내시고는 월요일에야 집으로 오셨다.
할머니께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을 때 아버지는 심적 갈등이 많으셨다. 불교와 기독교 중에서 어느 것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하여서는 교리를 충분히 공부해보고 또 실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먼저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시고, 다음에는 평양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셨다. 그런 다음 선택한 것이 기독교였다.
할머니께서 장문(張門)에 기독교를 들여놓은 사건은 할아버지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받들고 양반의 권위를 지키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믿는 기독교는 그것들과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조상에게 제사도 안 지낸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기둥 같은 아들까지 교리를 공부한다고 하며 그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는 집안이 기울었다고 생각하셨고, 마침내는 불꾸러미를 만들어 지붕으로 던졌다.

“이제 집안이 망했구나! 다 틀렸구나!”

양반 체면을 집어 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불길이 타올라 기왓장이 이리저리 뻥뻥 튀는 가운데 통곡소리가 들리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불을 끄러 나왔다. 멍석에 물을 뿌려 지붕으로 던지고 또 던져 겨우 불길을 잡았다. 할아버지의 그러한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교회 가는 행보는 조금도 달라지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나고 좋은 것은 교회로 가져가고, 맛있는 것은 교회 사람들을 먼저 먹였다.
할머니는 솔내(松川)교회를 나가는 게 멀고 힘이 들어 아버지에게 청을 하셨다.

“나를 위하여 ‘장주애’에 교회를 세워다오.”

아버지는 동네 초입에 있는 삼거리주막을 사서 교회를 지었다. 그것이 장주애교회이다. 그 교회로 해서 그 동네 사람 모두가 교인이 되었다. 다만 할아버지 한분만이 예외였다. 이유는 첩 할머니 때문이었다. 교회법에서 축첩을 금하는데 첩이 있으니 양심상 교회에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을 보면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막을 사서 교회를 세웠던 것은 동네에 주막이 없어야 술을 멀리하고 건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교회가 생기므로 동네 분위기도 좋아지고 농한기에 장정들이 술집대신 교회의 사경회에 나와 성경공부를 하였다.

출처 : 2012년 성서한국 여름 58권 2호, 10-11쪽, 장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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