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2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목록

설교자료

신앙의 초석을 놓으신 향정 할머니

존 로스 목사가 1882년에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국내에 들어와서 보급되면서 최초로 생긴 교회가 소래교회이다. 그 교회에 출석하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신 김향정 할머니의 삶을 그 손녀이신 장현심 할머니의 글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다.나의 친할머니, 김향정 할머니는 우리 집안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들여오신 분이시다. 옛이야기가 구전되듯이 할머니의 얘기는 지금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된다. 186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18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실 때 이름이 없이 그냥 김 씨였다. 그러다가 향나무가 있는 우물이 있던 동네에서 오셨다하여 향정(香井)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할머니는 결혼한 지 13년만인 1894년에야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다. 가산은 많았지만 자손이 귀했던 집안에 우리 아버지가 태어남으로 다시 활기를 찾은 셈이다. 증조부는 종이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사셨다. 전통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숭배하고 선비로서의 체모를 지킨 분이시다. 고을에 원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면 의례히 증조부를 찾아와 예를 표하였다.할머니는 종부로서 사방 삼십 리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는 넓은 농토와 대소가를 거느리고, 기제사와 사대봉사를 받드느라 하루 종일 바빴었다. 평상시에도 제사가 있을 때에는 동네의 일가아낙네들이 모여 제사를 도왔다. 그 절정은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초상을 치르는데, 일주일 내내 온 동네가 밥을 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밥을 먹으며 일을 하였다고 한다. 없는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느라 집안이 망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독자이신데 할머님 당신이 돌아가시면 똑같은 일을 아들 며느리가 고스란히 물려받아 평생을 조상치다꺼리만 하다가 말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셨다고 한다.야소교를 믿으면 조상 제사를 안 지내도 된다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것을 믿기만 하면 적어도 당신의 제사는 안 지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솔내교회를 당신발로 찾아가셨다. 초가로 지은 집이었는데 당시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던 시절이어서 내외를 했다. 야소교에선 금하는 것이 여럿 있었다. 우선 담배를 끊어야 했다. 술과 투전도 금하고, 축첩을 금했다. 금지사항이 모두 할머니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다.교회에 들어가는 초가 담벼락 초입에는 장죽들을 죽 세워놓았다. 담배를 미처 끊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 세워둔 것이었다. 예배당은 두 칸으로 지어졌는데 한 칸은 여자, 한 칸은 남자가 앉는 장소였다. 설교는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했다. 가운데는 벽이 있고 그 벽 위쪽엔 네모진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곳을 통하여 여자들은 설교를 들었다.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교회를 다녔다. 초대교회에서 하던 대로 성경을 글자그대로 실천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그대로 사느라 주일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외출도 하지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십 리 떨어진 교회에 주일예배를 보기 위하여 할머니는 토요일에 달구지를 타고 집을 나섰다가 주일을 보내시고는 월요일에야 집으로 오셨다.할머니께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을 때 아버지는 심적 갈등이 많으셨다. 불교와 기독교 중에서 어느 것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하여서는 교리를 충분히 공부해보고 또 실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먼저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시고, 다음에는 평양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셨다. 그런 다음 선택한 것이 기독교였다.할머니께서 장문(張門)에 기독교를 들여놓은 사건은 할아버지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을 받들고 양반의 권위를 지키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믿는 기독교는 그것들과 상관이 없었다. 더구나 조상에게 제사도 안 지낸다는 것이었다.할아버지께서는 기둥 같은 아들까지 교리를 공부한다고 하며 그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는 집안이 기울었다고 생각하셨고, 마침내는 불꾸러미를 만들어 지붕으로 던졌다.“이제 집안이 망했구나! 다 틀렸구나!”양반 체면을 집어 던지고 마당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불길이 타올라 기왓장이 이리저리 뻥뻥 튀는 가운데 통곡소리가 들리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불을 끄러 나왔다. 멍석에 물을 뿌려 지붕으로 던지고 또 던져 겨우 불길을 잡았다. 할아버지의 그러한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교회 가는 행보는 조금도 달라지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나고 좋은 것은 교회로 가져가고, 맛있는 것은 교회 사람들을 먼저 먹였다.할머니는 솔내(松川)교회를 나가는 게 멀고 힘이 들어 아버지에게 청을 하셨다.“나를 위하여 ‘장주애’에 교회를 세워다오.”아버지는 동네 초입에 있는 삼거리주막을 사서 교회를 지었다. 그것이 장주애교회이다. 그 교회로 해서 그 동네 사람 모두가 교인이 되었다. 다만 할아버지 한분만이 예외였다. 이유는 첩 할머니 때문이었다. 교회법에서 축첩을 금하는데 첩이 있으니 양심상 교회에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을 보면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주막을 사서 교회를 세웠던 것은 동네에 주막이 없어야 술을 멀리하고 건실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교회가 생기므로 동네 분위기도 좋아지고 농한기에 장정들이 술집대신 교회의 사경회에 나와 성경공부를 하였다.출처 : 2012년 성서한국 여름 58권 2호, 10-11쪽, 장현심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5

5.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출판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성경은 신앙생활의 토대이고 근거이고 뿌리입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난지에서 완성이 되고 출판이 된 <성경전서개역한글판>은 이후 1998년에 <개역개정판>으로 다시 개정되어 나올 때까지, 한국 교회의 유일한 예배용 성경이 되었습니다. 왜 이 성경의 이름을 <개역한글판>이라고 했는지도 역사 속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입니다. <대한성서공회사 3>을 통해서 해방 이후의 성서 사업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공회는 1952년 3월 숙원사업인 개역 한글판 성경전서 출판 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추진했다. 교정을 맡은 임영빈 총무는 참고하거나 비교할 다른 역본도 없고 의논할 성서학자도 없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며 교정지를 마무리했다. 그는 영국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정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교정지를 읽을 때 용서는 엄격하게 금지된다. 용서는 모든 인생사에서 선한 덕이지만 교정에서만은 예외이다. 교정지를 읽을 때에는 비판적이고 속이 좁고 잘못을 찾아내고 완고하게 엄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결과 최선의 책이 생산된다. 나에게는 세 명의 교정자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너그럽거나 자유롭거나 우호적이거나 포용적이 되지 말고, 오류와 잘못을 찾아내는 전문가가 되라고 늘 격려한다. 만일 그들이 읽은 교정지에서 내가 오류를 찾아낼 때는 나는 그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찾아내는 데 기술이 모자라기 때문에 교정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목회자로서 내 직원들에게 오류와 잘못을 찾는 전문가가 되라고 격려하는 내가 스스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본문이나 지리적 문제 때문에 당황스럽다. 나는 비교할 다른 본문도 없으며, 성서학자를 방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당시 실무에 종사했던 김태룡 간사에 의하면 출판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조판 체제는 구식대로 내리 글씨 2단으로 46배판 형으로 결정했다. 교정원으로 오인명(吳仁明; 새문안교회 장로)과 강석모(姜錫模; 연합신문 교정부장)가 임시직으로 수고했다. 한여름 더위에 작업이 강행되었는데, 임 총무는 초교(初校)에서부터 교료(校了)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재독하면서 직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직접 교정을 보았다. 활자를 넉넉히 주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교지에는 복자(伏字: 해당 글자의 활자가 없을 때 다른 글자의 활자를 뒤집어서 ☒☒☒와 같이 임시로 조판한 것)가 많았고, 재교지와 3교지에도 글자가 채워지지 않았다. 고유명사 분별을 위해 인명에는 외줄로 표시했고, 지명에는 쌍줄 옆줄 표시를 했으며, 절(節) 표시에는 작은 숫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교정하는 데는 8교, 9교까지 나갔다. 최종 교정은 외부의 교열(校閱)을 받았는데, 김태룡의 은사 안신영(安信永) 선생이 수고했다. 66권의 책명 글자는 활자가 아니고 붓글씨 연판(鉛版)인데 이 글씨는 최수섭(崔銖燮) 씨가 썼다. 인쇄용지와 제책 재료는 미국성서공회가 지원했다. 책형은 국배판, 강대용(講臺用)으로 하고 장정은 견포의(堅布衣) 제본으로 결정했는데, 46배판으로 조판했으므로, 책을 펴면 좌우상하에 훤하고 넓은 공간이 있어서 시원스러웠다. 초판은 3,000부를 발행했다. 인쇄용지와 천과 판지의 면세 통관은 한순규 간사가 처리했고, 8월 중에 인쇄를 끝내고 제책 공정에 들어갔다. 책 첫 장 속 표제(標題=內題)에 1952년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 뒤끝에 단기 4285년 9월 1일 인쇄, 9월 10일 발행이란 날짜가 찍힌 한글판 성경전서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책 표제(標題)의 글씨는 오인명 장로님이 받아왔는데, 국민학교 여교사라고만 알고 그 성명을 모르고 넘어갔다. 아쉽게 생각한다. 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을 1단 23자 23행, 상하 2단으로 구약이 1,223쪽, 신약이 399쪽 도합 1,622쪽이다. 책 크기는 가로 22cm, 세로 28.5cm. 반포 값은 얼마였나? 본래 성서에는 책값 표시를 않기 때문에 책에서는 알 수 없다. 기독공보 1952년 11월 3일자에 실린 신간 광고에서 75,000원(圓)임이 밝혀진다. 간기(刊記)를 보면 발행소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92, 인쇄소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1가 8로 되어 있다. 이는 부산은 잠정적 임시 거처요 본거지는 서울임을 의식하고 실지와 다른 표시로 간기에 나타낸 것이다. 전쟁 중인 1952년 9월에, 피난지 부산에서 한글판 성경전서를 출판하였다. 당시의 교계신문도 “전국 교회 대망의 한글판 성경 완성”이라 하여 임영빈 총무의 담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백만 신도 대망의 한글판 성경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바친 노력과 경비는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기자는 한글판 성경 완성의 소식을 듣고 대한성서공회 총무 임영빈 목사를 찾아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고심담을 다음과 같이 듣게 되었다. 전란의 와중 전전유랑(轉轉流浪) 피난의 생활 중에서 이 거대한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금일 그 완성을 보게 된 것은 우으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특히 산파의 역할을 한 임영빈 총무의 노력이 대단하였음은 전교계가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연내의 숙제이던 한글 철자법 성경 교정과 인쇄 출판은 근간 여러 가지 죽을 뻔 한 과정을 지내 이번에 그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글 성경의 인쇄를 시작하기는 금년 4월이고 인쇄가 끝나기는 9월 25일이다. 제본이 끝나려면 앞으로 한 10여일 걸릴 것 같다. 이 인쇄를 한 인쇄소는 피난 온 협진인쇄소요, 인쇄교정을 본 이들은 김진룡, 오인명, 강석모, 오한근 제씨며 또 임영빈 총무 안신영 선생들이다. 그들이 더운 여름 밤낮 교정을 보아 한글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 성경의 총 페이지 수는 1천 6백 14페이지로 예전 성경보다 3백 32페이지가 줄어서 책 매기도 좋고 모양도 좋게 되었다. 종이 값 인건비를 제하고 순 인쇄비와 제본비만이 1억 5천만 원이 되고 종이 값 인건비를 가산하면 2억 7, 8천만 원이나 된다. 우리는 이렇게 비싸게 박인 성경을 우리 교계에 어떻게 하여서든지 적당한 값으로 제공하려고 하여 판매정가를 7만 5천원으로 정했다. 이번에는 강대용으로 국판배판 4호 활자로 3천부만 인쇄했다. 보급판은 이 대본으로 축소 인쇄하여 추후에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초판을 인쇄할 때 앞뒤 판을 바꿀 때마다 한쪽 면만 인쇄된 것을 5장씩 별도로 빼서 일본의 로버트슨에게 보냈다. 그는 그것을 원고로 삼아 국판, 46판, 국반판 등 축쇄판을 1953년 도쿄에서 인쇄·제책하여 부산에 보내어 반포하도록 했다. 1952년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에서 처음으로 ‘한글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국한문’판과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옛 철자법 성서와 당시 정부에서 사용하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따르는 새 철자법을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했다. 한글 새 철자법으로 처음 출판된 이 성경의 출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4

4.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서사업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도저히 성서 사업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외국 성서공회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피난지에서도 최선을 대해서 성서를 보급한 담당자들이 있었기에 외국 성서공회들의 지원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한 가지 일도 저절로 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개정 원고를 부산으로 가지고 갔던 임영빈 총무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월 25일 남침한 북한의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성서공회 직원들은 그때까지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다행히 경리 담당자 한순규가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재단법인 기금과 예금을 인출하여 성서공회 금고에 확보해 두었다. 임영빈 총무는 서대문경찰서 앞에서 보위부에 끌려갔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왔으나, 공산당의 지시대로 매일 사무실에 나와 감시를 받았다.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임 총무는 전 직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을 주고, 각자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했다. 이에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은둔하거나 피난길에 올랐다. 성서공회도 1950년 9월과 1953년 11월에 성서회관이 두 번이나 파괴되고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서울을 떠나 피난지 부산에서의 사업은 생존을 위한 고투였다. 그러나 전쟁이 만든 폐허와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으며, 새 철자법으로 만든 한글판 개역 성경 원고를 보존하고 마침내 출판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었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도 한글판 개역 성경전서의 수정 원고가 항아리에 담겨 기적적으로 보존되는 일이 일어났다. 출판 담당자 김태룡은 폭격 당한 인쇄소 건물에서 사라진 100여 장을 제외한 한글 개역 성경 수정 원고를 찾아서 임 총무에게 인계했다. 이 귀중한 원고를 받은 임 총무는 부인과 큰 아들에게 몰래 시골 친척 집에 가서 숨겨두게 했는데, 이들은 원고를 김치 항아리에 담아 용감하게 먼 길을 헤치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서울 수복 직전 9월 26일 화재로 성서공회 건물이 전소했을 때 수많은 성서와 인쇄용지와 서류가 모두 불타고 말았지만, 이들의 위험을 무릅쓴 조치를 통해서, 한글판 개역 성경 원고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임 총무는 이 1차 수정 원고를 파내어 잘 간수했고 부산에 가져가서 2차 수정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공회 직원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관으로 사용할 마땅한 건물을 구할 수 없어서 우선 대청동 중앙장로교회 지하 한 칸을 빌려 사무실로 사용했다. 공회 직원들과 임영빈 총무도 1950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눈 내리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가족들을 배편으로 보내고 짐은 다른 배로 부쳤다. 그리고 자신은 남아서 뒷정리를 한 후 겨우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기차 칸마다 피난민들과 화물로 가득 찼고 자리가 없어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기차 지붕에 엎드려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지붕에 있던 이들 중에는 얼어서 죽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부산행 열차에서 한글 개역 성경 원고가 다시 한 번 안전하게 보관되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임 총무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감격적으로 썼다. 나는 성경 수정 원고를 트렁크 속에 넣어두었으나, 마지막 순간 화물들을 보낼 때, 원고를 트렁크에서 꺼내어 나의 작은 손가방에 넣었습니다. 트렁크를 잃어버리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무심코 그렇게 했습니다. 트렁크는 잃어버렸고 원고는 건졌습니다. 그 원고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역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겪은 경험을 통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통해서 주어진 여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나에게 역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살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한글 성경 수요가 급증할 것을 예상하던 임 총무는 1951년 2월 한글 성경 출판을 서두르기 위해서 일본 도쿄로 초청을 받아 갔다. 그러나 한글을 출판할 수 있는 인쇄소가 없었다. 일본인 인쇄공을 통해 활자를 주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한글을 몰라 작업이 원만하지 못했다. 임 총무는 1952년 3월 부산으로 돌아왔다. 임 총무가 돌아오면서 남포동 1가 53번지의 2층 목조 건물을 임시로 빌려 성서회관을 마련했다. 2층에는 임 총무의 가족이 살고 아래층은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 남포동 사무소에서 일본 도쿄의 로버트슨 협동총무가 보내준 한글 성경으로 1년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위해 수십만 권의 성서를 반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태룡은 공보부의 직영공장에서 좋지 못한 활자로나마 사진 원고용 인쇄를 만들었으며, 표제를 『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붙이고 표지를 도안하여 로버트슨에게 보냈다. 이 표제의 도안은 당시에 국민학교 저학년 교과서 표제를 붓글씨로 쓴 바 있는 최수섭(崔銖燮) 씨가 만들었다. 몇 달 후 그 『기쁜 소식』 10만 부를 인쇄하여 보내왔다. 성지 사진 64매를 넣어 편집한 누가복음 『기쁜 소식』은 권당 1,500원에 판매 보급했다. 이 『기쁜 소식』은 정부가 채택한 새 철자법으로 된 첫 한글 성서였기 때문에, 전쟁 중에 책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립 초중학교의 교과서로도 채택되었다. 사진이 들어간 큰 글씨의 복음서는 그림책이나 잡지처럼 편집되어 있어서 서울, 부산, 대구의 서점에서도 유치원생부터 청소년들에게까지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쁜 소식』은 1952년 한 해 동안 그 어느 책보다 잘 팔리는 책이 되어 전쟁 중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1882년 로스에 의해 첫 한글 복음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출간된 지 70주년이던 1952년에, 로스가 지향했던 아래 아가 없는 단순한 철자법을 채택한 『기쁜 소식 누가복음』이 어린이의 손에까지 들려 읽히게 되었다. 이 『기쁜 소식 누가복음』은 모두 20만권이 출판되어 보급이 되었다. 영국성서공회 지원: 성경전서 21,500권, 비용 6,350,000엔 미국성서공회 지원: 성경전서 3 0,000권, 비용 10,000,000엔 신약전서 200,000권, 비용 14,000,000엔 단편 성서 700,000권, 비용 3,500,000엔 삽화 누가복음 200,000권, 비용 3,600,000엔 미국성서공회 소계 31,100,000엔 = 86,000달러 1952년 부산에서 출간한 성서는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3,000부와 단편 89,700부, 합계 92,700부였다. 그 해에 미국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는 718,783부의 성서를 보내주었다. 1950~1953년 출판된 성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34종 가운데, 성경전서는 런던(1950년), 동경(1950년, 관주), 동경(1952년, 한글판), 동경(1953년 관주), 동경(1953년, 두 가지 판)에서 출판되었다. 신약전서는, 동경(1950년, 관주), 동경(1950년, 부 시편), 동경(1950년 간이국한문), 동경(1952년, 한글판, 두 가지 판), 뉴욕(1953년)에서 출간되었고, 전쟁 전에 서울에서 출판된 판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3

3. 개역한글판 성경의 출판 준비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개정 작업과 조판 및 출판이 육이오 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완성된 역사는, 돌아볼수록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온통 혼란 속에 있을 때도 성서 사업을 감당했던 분들은 흔들림 없이 옛 철자법으로 되어 있던 <셩경개역>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개정하는 작업을 서둘러 추진했던 일은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신문과 잡지 등 모든 출판물들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출판되고 있었습니다. 성서 사업을 추진했던 분들은 성경의 철자법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임영빈 총무가 1949년 3월 취임한 후 주력한 사업은 새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의 출판이었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개역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하여 1949년 상반기에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출판했고, 이어서 성경 전체 본문의 철자법을 수정했으며, 조판 작업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모든 출판물이 새 한글 철자법을 채용하자, 성서공회도 새 철자법에 맞는 개역 성경을 출판하는 것이 시급했다. 1947년 성서위원회에서 김춘배 목사가 “성경을 새로 인쇄하려면 새 철자법을 사용하자”는 안을 제기했다. 1948년에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개역 성경의 철자법을 수정하기 시작하여 새 맞춤법을 적용한 『마태복음』을 출판했으나, 통일안의 기준에서 벗어나 많은 지적을 받은 후 중단 상태에 있었다. 임영빈 목사가 1949년 3월 제2대 총무로 취임한 후 주력한 첫 사업은 새로운 한글 맞춤법을 수용한 성경전서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철자법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르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졌던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개역 한글판 성경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일단 4복음서를 개역 한글판으로 1949년 상반기에 출판했고, 10월 말까지 3만 권 이상을 반포했다. 개역 성경의 맞춤법 수정 작업은 시작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50년 2월에 마무리될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김태룡이 성서 위에 그대로 붉은 잉크로 수정을 하면 강병주(姜炳周) 목사가 이를 감수하고 다시 임영빈 총무가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태룡은 이 작업이 끝나면 문교부 추천으로 강릉사범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임영빈 총무의 부탁으로 그 해 4월부터 공회 출판부의 정식 직원이 되어 성서의 조판과 출판을 담당했다. 1950년 4월부터 성경전서의 활자 개발과 조판 작업에 들어갔으며, 6월부터 교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경전서 100여 페이지의 초교가 나왔을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고, 폭격으로 인쇄 공장이 파괴되면서 성경전서의 출판은 중단되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2

2.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해방이 되고,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성서 사업을 담당했던 분들은 성서공회 재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성서 보급 사업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사진: 이 시기에 ‘연합성서공회(세계성서공회연합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신약개역>]] 성서공회는 해방 직후 혼란과 분열 속에서도 정태응 총무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재건에 착수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리 점령 결정에 따라, 하지(J. R. Hodge) 중장 지휘 하에 미 육군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1945년 9월 9일 남한에 군정을 포고하고, 12일 아널드(A. V.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미 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정태응 총무는 미 군정 당국에 조선성서공회의 역사를 보고하고 적산으로 편입된 재산의 반환과 성서사업 재개를 요청했다. 군정의 적산 관리국은 9월 19일 공회의 사업 재개를 허락하고, 일제가 압류했던 재산을 정태응 총무에게 반환하고 적산 해제를 통고했다. 공회의 자산을 돌려받은 정태응 총무는 10월 11일 종로 성서회관을 다시 열고 성경 판매를 재개하는 한편, 오긍선 의사와 김관식 목사와 함께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회 재건을 논의했다. 위원회는 이 날짜로 공회에 토지를 헌납한 이풍한(李豊漢) 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풍한은 대한제국 말기에 판서를 지냈으며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대지주였는데, 소유하고 있던 논밭 80만 평 가운데 30여만 평을 공회에 기증했다. 그가 이런 막대한 토지를 기부한 것은 해방의 충격과 함께 오랜 친구인 정태응 총무의 설득과 공회 사업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이풍한은 1945년 12월 언더우드(H. H. Underwood) 박사와 함께 성서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6년 11월 7일 해방 후 첫 성서위원회 연례회의가 열렸다. 성서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성서공회 재단 설립을 위해 임명된 실행위원회는 1947년 4월 30일 회의에서 재단법인 신청을 위한 공회 정관을 제정했다. 재단법인 설립은 재정적 자립과 함께 조선성서공회가 독립하고,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협력 기구로 남는 것을 의미했다. 1948년 5월 7일 미국성서공회 로버트슨(James C. F. Robertson) 박사가 한국에 부임하여, 임시 부총무 스코트를 대신하여 미국성서공회 대표자로서 부총무직을 맡았다. 정태응 총무는 70세 정년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성서공회에서 은퇴하고, 그의 후임은 성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에서 결정하도록 결의했다. 1948년 12월 23일에 열린 재단 이사회에서는 이러한 결의에 따라 성서위원회의 지명 추천을 받은 임영빈 목사를 정태응 장로 퇴직 시 후임 총무로 임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조선성서공회의 명칭을 대한성서공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8월 23일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공식 출범한 공회는 1948년 11월부터 대한성서공회로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49년에 공회에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조선성서공회가 대한성서공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임영빈 신임 총무가 취임했으며, 회계연도도 10월 31일자로 마감하도록 변경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를 협력공회로 초청했으며, 세 협력 공회의 대표는 한 명으로 하기로 하고 그를 부총무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회 이사들을 새로 선출했는데, 이후 성서위원회가 후보를 추천, 선임하기로 했다. 1949년 10월 26일 문교부장관의 명의로 대한성서공회 재단법인 인가가 나왔다. 해방 후 1945년 9월에 성서공회는 군정 당국으로부터 적산에 포함되어 있던 성경전서 15,320권, 신약/구약전서 42,961권, 단편 509,343권(총 가치 91,207원)을 돌려받았고, 곧바로 이들의 판매에 들어갔다. 그 결과 12월까지 세 달 동안 성경전서 1,634권, 신약/구약전서 8,949권, 단편 231권을 판매했다. 몇 년 동안 성경이 판매되거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심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성경을 구하러 서울까지 오는 이들도 있었고, 성경을 구입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회가 가진 성경 재고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에 대처할 수 없었고 새로 인쇄할 비용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1945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기증한 미국성서공회에 다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1946년에 신약전서 25,000권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영국성서공회는 중국 중경에 있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위해 1,000부의 신약전서를 출판하도록 지원했다. 1945년 9월에 인쇄된 이 신약전서는 중국에서 미국성서공회 대리인으로 활동하던 모르텐슨(Ralph Mortensen)에 의해 9월 20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임정 부주석 겸 한인기독교공동체 회장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전달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성경 반송이 봉쇄된 상황에서 출판된 이 중경판 신약전서는 긴밀한 국제 협력의 산물이었다. 임정 요인과 독립지사들은 해방 이후 출판된 이 첫 한글 신약전서를 들고 10월과 11월에 귀국했다. 미국성서공회는 미국장로회의 지원으로 1945년 9월 뉴욕에서 25,000부의 한글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이 가운데 수천 권이 먼저 하와이에 있던 전쟁포로수용소의 한국인 포로들에게 보내졌다. 미국성서공회는 1947년 50,000부의 한글 신약전서와 25,000부의 복음서를 인쇄하여 미 군정 당국의 협조를 통해 서울 공회에 기증했다. 한편 성서공회 사업을 위해 과거에 오랫동안 실시했던 5월 마지막 주일을 성서주일로 지키는 전통도 1946년에 회복되어, 180여 개 교회가 성서주일 헌금 23,454원 59전을 공회에 전달했다. 이 가운데 6,200원은 정동교회 미군 예배에서 연보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금도 일반 후원자 10원, 특별 후원자 100원, 평생 후원자 1,000원 세 종류로 모집하여 437명의 후원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33,590원을 기부했다. 1946년 여름 홍수로 많은 교인들이 집을 잃었다. 공회는 이들을 위해 성경을 무료로 지급했다.

설교자료

대한성서공회의 재건 및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루어진 <개역한글판> 성경 출판 1

<대한성서공회사 3>에는 1945년 해방 전후의 성서사업으로부터 2002년까지의 성서 사업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제 말 성서 사업이 강제로 중단된 때로부터, 해방 후 성서 사업이 다시 시작된 일과,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진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출판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이루어진 일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그리고 육이오의 전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의 개정과 출판과 보급을 뒤돌아봄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성경이 선배 신앙인들이 피와 땀의 결실인 것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서주일 설교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가려 뽑아서 소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서공회사 3>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성서 사업 강제 종료 [[성서주일 설교 자료 설명: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지를 받던 마지막 시기인 194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는 성서 사업 자체를 압박하다가 마침내 성서사업 자체를 중단시킵니다.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는 내용을 보면, 식민 통치의 은혜가 아니라 그 속셈이 얼마나 간악한지를 역설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신사참배와, 일본인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인 동방요배를 하며, 승전기도회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광복과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습니다.]] 1940년 9월 19일 실행위원회가 조직된 날 저녁 정태응 총무는 공회의 다른 직원 두 명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구속되었다. 외국인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는 간첩 혐의였다. 그는 70일 동안 감금된 후 11월 28일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 정책에 협력하도록 협박을 받았다. 정태응이 수감 중이던 11월 21일, 성서위원회 임시회의는 외국 선교사를 배제한 채 21명의 한국인과 일본인만으로 위원을 구성하기로 정관을 개정했다. 1941년 1월 1일 조선성서공회는 홉스 총무와 정태응 총무 책임 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월 10일 일본교회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서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 설립 방안을 논의했으며 3월에 재단법인을 구성했다. 이는 3월에 김경삼이 장로회 총회 특별위원을 통해 시가 30만원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기증하여 매년 경상비 1만 5천원을 공회에 제공하면서 법인 구성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4월 1일 정인과가 공회의 총무로 취임하고 공회의 업무를 장악했는데, 이는 일제 당국의 강요에 의해 통과된 계약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홉스 총무는 1941년 3월 18일 모든 재고와 재산을 조선성서공회 유지재단에 인계하고 사업을 마감했다. 태평양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홉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태응을 조선성서공회 대리총무 겸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권한을 위임한 후, 안식년 휴가를 명목으로 5월 23일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이는 1895년 켄뮤어 총무의 부임 이후 46년간 서울 지부를 통해 성서사업을 해 온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정태응은 다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10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대영성서공회 유지재단이 영국 이름이지만, 일본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석방되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노력한 끝에 공회 재단의 자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12월 22일 적산 관리법과 적산 관리 시행령을 공포하고, 29일 ‘적산관리법 시행규칙’을 공포한 후, 외국 선교부나 외국인이 관여한 재산을 압류했다. 1942년 5월 23일 모든 공회의 자산은 적산 관리인인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지부장의 손에 들어갔다. 정인과 총무를 비롯한 공회의 친일 직원과 성서위원회 위원들은 공회의 자산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6월 9일에는 성경 판매 중지 명령에 의해 성서사업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다만 1943년 7월에 3주일간 성서 판매가 허용되었다. 1942년 6월부터 4년간 성서공회 사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일본 천황제 이념과 국체의 본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와 모든 기독교 문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한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유대 민족주의 요소가 강한 구약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요한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검은 먹이나 붉은 잉크로 일부 구절을 지우거나 찢어버린 훼손된 성경을 사용하며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와 승전기도회에 참여했다. 그런 훼절과 수난의 교회에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해방이 찾아왔다.

설교자료

종 문서를 불태운 과부 교인

강화읍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과부교인’ 김씨 부인이 있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였지만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란 여종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어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18장을 읽다가 18절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였다. 그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 즉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요?” 그러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좋다.” “마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들이기로 했다. 종에서 양녀로 신분이 바뀐(롬8:14) 복섬이는 더욱 정성스럽게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얻은 딸로 더욱 기뻤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의 감동 또한 컸다.    이런 식이었다.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읽었다. 강화의 어떤 교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했던 것처럼 침으로 갠 진흙을 맹인 눈에 바르고(요9:6) 기적이 나티나기를 기다려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 같은 ‘문자적’ 신앙을 미신적인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문자적으로’ 실천함으로 뒤이어 나타날 이적에 기대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교회 ‘개종 1세대’는 성경을 읽되 ‘해석’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성경을 읽는 한국 교회 특유의 소박한 신앙 전통이 수립되었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설교자료

빚 문서를 태운 부자 교인

1900년 무렵 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에 종순일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잘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 전도사가 증인이 되었다, 그리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교인이 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19:21)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들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음 섬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 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봄 46권-1호, 이덕주

설교자료

한국의 마케도니아인

한국에 (개신교)복음이 들어오던 1870~80년대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변동기에 겪어야 할 혼돈과 창조의 시대였다.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내적인 개혁과 외적인 개방을 요구하는 신진세력과 기존 가치 체제와 사회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 세력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빚어질 것은 자명했다. <‘조선에서 가장 귀한 책’>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대원군을 중심한 수구세력과 명성황후를 중심한 진보 세력의 무력 충돌로 발전된 이 사건 와중에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데 공험한 이수정이란 양반이 있었다. 그는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처음 목적은 농학과 법률, 우편, 해운 등 ‘개화된 문명’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882년 9월 일본에 도착한 직후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였던 츠다센을 만났다. 그런데 츠다센은 유럽 유학 중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농학사’를 설립, 운영하면서 일본 농업의 근대화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수정은 츠다센을 방문해 대화하는 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한문 족자에 눈길이 쏠렸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 팔복’ 말씀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동양의 고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츠다센은 이 호기심 많은 이방인에게 족자 글귀의 원전인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읽을수록 그 책에 빨려 들었다. 그가 성경 읽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둘이 책을 한 보따리 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오.” 그리하여 ‘조선에 가장 귀한 책-성경’에 대한 외경스런 탐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4월 29일 도쿄로 게츠죠교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한국인 개신교 세례였다. 이수정은 세례 받은 직후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권유와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그에게 지급되던 장학금을 중단하고 귀국을 종용하였고 가족도 나와서 “목숨이 위험하니 어서 빨리 ‘사교’(邪敎)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어떤 위협과 회유도 그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그는 성경 번역에 몰두하여 1884년, 한문 성경에 우리말 토(吐)를 단 형태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어 나왔고, 곧이어 마가복음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착수하여 1885년 2월,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란 쪽복음이 인쇄되었다.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호소>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루미스와 매클레이, 녹스 등 자신을 돕고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교회에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1883년 12월 13일에 쓴 편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문안합니다. 아직도 수천만 우리 민족은 하느님의 참된 도를 모른 채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퍼져 나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도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지구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 기독교가 주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잘 되도록 저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그의 편지도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성경을 번역한 것도 ‘민족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나와 선교하는 것이었다. 국내 분위기도 바뀌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 정보는 나라를 개방해서 외국과 교류하여 백성들의 처지를 개선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용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색출해서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말라고 호소했다. "여러분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배치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걱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나라 교사”는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66년 천주교인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만향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 전술이었다. 이수정은 이러한 ‘침략적 종교’가 지닌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근대화를 위한 개방과 개혁은 민족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수정은 우리 민족의 자기 개혁의 원리를 복음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가르쳐 줄 선교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비록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여러분이 선교사들을 파송만 해준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간곡하게 바라는 바는 지금 당장이라도 몇 명을 이곳 일본에 보내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과 협의하면서 사업 준비를 하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야말고 가장 안전하도고 적절한 방법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진지하게 검토해주시기를 간절하게 빌고 원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드림 영문으로 번역된 그의 편지는 「Missionary Review」같은 미국의 선교 잡지에 소개되었고 이 일로 이수정은 서방 기독교계에 ‘한국의 마케도니아인’(Macedonian of Korea)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시아의 서쪽 끝, 드로아에 머물고 있던 바울의 꿈속에 나타나 그로 하여금 유럽 선교의 길을 열게 만들었던 마케도니아인처럼(행 16:8~10), 아시아의 동쪽 끝 한국에서 건너온 이수정의 호소는 복음 선교의 물꼬를 한국 쪽으로 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편지가 서방에 전달된 1년 후 미국 교회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고 1885년 2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 한국 선교 개척단이 한국으로 가기 전 일본으로 들렀을 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한국 언어와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중 선발대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했을 때, 그들 짐 속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 마가복음이 들어 있었다. 어느 지역 개척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서를 가지고 들어간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희귀한 경우였다. 출처 : 1999년 성서한국 가을 45권-3호, 이덕주

설교자료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

성경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유대인들은 유대식으로,헬라인은헬라식으로,유럽인은 유럽식으로,아프리카인은아프리카식으로 대했다.마찬가지로 한국은 한국식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해석하고, 실천했다. <사경회 : 한국 교회의 ‘유월절’>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대할 때 종교적 경외심을 갖고 최상의 예를 표하였다.성경은 함부로 해서는 안될 종교적 경외와 예배 대상이었다.한말 평양에서 활동하던 ‘마들린’이란 한국인 전도부인은 “아이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경은 반드시 선반 위에 모셔 놓아야 하고 성경을 옮길 때는 항상 두 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하면서 성경을 팔았다고 하는데,이는 동양 특유의 ‘경전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성경은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경전’이었다. 이런 한국식 경전 문화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사경회이다.요즘 사경회는 길어야 사흘,그것도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 예배를 끼고 해치우는 것으로 끝나지만,옛날 사경회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이었고 길면 한 달이었다.선교사들은 농번기 때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수백 리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왠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경을 배웁니다.” 평양 선교사 블레어는 한국 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 생활을 접어 두고 오직 성경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합니다.이같이 성경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 전체가 하나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었다.사경회가1907년 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준 사실이다. <성경을 외우는 맹인 전도자> 초대 교회 사경회는 형식에서도 달랐다. 마치 서당에서 경전을 배우는 것과 같았다. 훈장 앞에서 학동들이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과 중용을 배우듯 교인들은 인도자 앞에서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읽으며 배워 나갔다. 초기 사경회 공부도 성경 외우기로 시작되었다. 암송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다. 선교사들은 이런 한국 교회의 성경 암송 문화에 대해 경이로운 찬사를 보냈다. 일제시대 감리교 협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데밍의 증언이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그의 눈이 되어 복음서 전체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그는 말씀 공부에 전념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사람은 사람은 매서인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과 절까지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들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에서는 이 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해 성경 배우는 깊은 맛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교인’은 개성의 전설적인 ‘맹인 전도자’ 백사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맹인이 되어 개종 전에는 명복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 백사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 동안 점쳐서 번 재산을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지팡이 하나 잡고 전도 길에 나서 고양∙파주∙장단∙개성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는 아들(백남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외워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성경 녹음기> ‘성경 암송’은 한국 교인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은사는 맹인처럼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인 여수 애양원 사람들의 ‘성경 암송’이 유명했다. 일제 말기인 1939년,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던 남장로회 선교사 뉴랜드의 증언이다. “애양원 식구 전체가 모인 가운데 사경회 마지막 행사로 성경 암송 대회를 했습니다.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이 환자를 상대로 성경 중에서 아무 곳이나 지정하면 그들이 그것을 외우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온 환자는 신약 전체를 외우는 남자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 곳에 들어온 지 수 년 되었는데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병도 병이려니와 흉폭하기 짝이 없는 거지 대장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곳에 들어와 성경을 접하고부터 사람이 변해 놀라운 기억력으로 성경을 외우게 되었답니다. 그는 시력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도 없었고 아래턱도 반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행복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택했고 우리는 20장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외우기 시작하자 다른 환자들은 성경을 펴서 그가 한 자라도 빼먹지 않는가 손으로 짚어 가며 확인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노인이 나와 기쁜 표정으로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애양원의 ‘성경 암송’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양원 식구들은 지금도 매주 모여 성경을 암송한다. 애양원에서 ‘성경 암송반’을 이끌고 있는 양재평 장로는 19살 때(1942년) 이 병에 걸려 애양원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30살 때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손가락이 뭉그러져 점자도 읽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성경을 외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시력까지 잃게 되자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하소연했어요. ‘눈까지 가져가시면 절보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요. ‘귀하고 입은 남겨 두었다.’ 그래서 성경을 듣고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는 20년만에 신약 성경을 외워 ‘성경 녹음기’가 되었다. 신약 전체를 순서대로 줄줄 외울 뿐 아니라 “빌립보서 3장 12절”하면 즉시 그 구절을 정확하게 기억해 외운다. 그래서 애양원 방문객들은 성경을 줄줄 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가 된다. 이같이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경 암송’ 문화야말로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다. 하긴 성경 암송대회가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또 있을까? 출처 : 2000년 성서한국 여름 46권-2호, 이덕주

설교자료

성경과 한국 사회의 변화(試論) - 이만열

성경의 한글 번역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도록 하여 성경의 교훈과 사상을 체화하도록 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자기시대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시대와 사회에 대해 응답적인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구한말 처음으로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기다리고 중요시했는가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얼마 안되었을 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crying need)”를 했다. 1898년경 성경 번역이 지지부진하자 평양에 사는 어떤 교우는 예수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이라고 전제한 후, 그 성경을 지방에 내려 보내주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린다”고 했고, 어느 서점 주인은 “신약전서를 전부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 같이 기다린다”고도 했다. 이렇게 성경 번역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국 초대기독교인들의 영적 갈급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당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필자의 경험이긴 하지만 해방 후 시골 교회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위인들의 행적을 듣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해방 후에 그랬다면 일제 강점하에서 구약에 나타난 위인들의 민족적인 사기를 읽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일제의 노예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을 것이다. 블레셋을 상대로 한 삼손과,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면서 같은 처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포로된 다니엘과 에스겔을 보면서 그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적 범죄가 갖는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엄숙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포로귀환의 때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면서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적 시련 앞에서 응답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먼저 한말에는 국권수호 운동에 나섰던 뜻있는 젊은 야소교인들을 한국사에서 만난다. 이토오(伊藤博文)를 제거하려다가 자결의 길을 택했던 정재홍(鄭在洪)은 한말 교육자요 기독신자였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한국 외교부의 고문 자격을 가지고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본국에 가서 일제를 위한 공작을 꾀하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한국인 기독청년 장인환(張仁煥)에게 피살되었다. 천주교인 안중근(安重根)과 이토오를 포살하는 데에 동조한 우덕순(禹德淳)은 신앙적인 애국시를 남겼다. ‘야소교 동지’들과 함께 이완용ㆍ이용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명동 성당 앞에서 매국 총리대신 이완용 제거에 앞장선 이재명(李在明) 역시 기독청년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자기 시대와 민족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다.일제 강점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민족에 대한 응답적 삶은 더 광범하게 나타난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지도자들이 거사 참여에 앞서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서는 그들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신 민족을 위해서 순명(殉命)을 각오했던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관여한 이들이나 무장투쟁 혹은 의열운동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 이들 또한 성경과 기독교적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민족에 대해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자,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인만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신사참배에 저항, 많은 신자들이 투옥되고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를 냈다. 이러한 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의 범주에서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성경에 근거한, 선교사들의 표현을 빌면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노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뒷날 다시 한국을 찾아 몇 권의 저서를 남긴 매켄지(F. A. McKenzie)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투쟁의 원천이 성경에 있음을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크, 햄프던 및 조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어느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신문학 교수였던 최준이 “한글로서의 한국말 성경이 나타남으로써 한국의 국민대중들은 비로소 자아(自我)를 다시 찾게 되었고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립상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그가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계 신문이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을 폈고 자주 독립사상을 앙양했다는 지적과 함께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국 민족운동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저항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국권(독립)수호, 국권(독립)회복에 있었지만, 또 한 흐름은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국 민족운동의 가장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만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기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의 도정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민주화의 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는 인민평등의 실현이다. 한국이 인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세봉건적인 혈통신분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유교적 봉건사회에서는 혈통에 의해 크게는 양천(良賤)으로 이분화했는가 하면 좁게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분법적 신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숙명적으로 주어진 혈통은 곧 신분제라는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이런 신분구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교육, 예의, 사상(安分) 및 법제적 측면에서 자신의 신분질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회적 장치를 공고히 했다. 혈통신분제는 숙명적이어서 개인적인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었다.그러나 기독교의 수용은 이런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평등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본래 혈통에 의해 차별화된 신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과 천민을 구분, 차별화하는 양천 제도가 있을 수 없다. 이같은 사상을 제시한 것이 기독교의 성경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의하면 혈통신분제는 인간사회, 특히 지배층이 독점적 지배를 위해 ‘숙명적인 질곡’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 사상에서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반인간적이고 반천륜적인 제도다. 노비제도와 양천(良賤)제도를 정비한 법제적 검토는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이뤄졌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인민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과한 후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이런 혈통신분제의 벽을 허물고 실질적인 인민평등을 촉진한 것은 예수교요 그 기반인 성경이었다. 따라서 한말 성경에 기반한 예수교회에서는 혈통신분제를 극복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 박서양(朴瑞陽) 부자가 양반 신분 못지 않게 활동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은 혈통신분제를 용납하지 않는 성경과 교회 때문이었다.혈통신분제를 극복해 가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한국 사회는 서서히 군주ㆍ양반 중심의 전제군주적 구왕조(舊王朝) 회복을 의미하는 복벽(復辟) 사상을 극복하게 되었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제도’인 민주공화정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3.1운동이었다.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가 참여한 3.1운동은 그 독립선언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천명했다.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의 염원이 제도적으로 실현된 것이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1919년 4월의 대한민국의 약법(헌법)은 이를 보증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기독교의 이런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조밀하게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만민평등의 성경적 세계관이 한국의 민주화에 이렇게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만열, “한글 성경 완역 출판과 한국 사회,” <한글 성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 국어 문화에 끼친 영향>(서울: 대한성서공회, 2011), 7~54페이지 중에서 발췌

설교자료

한글 성서와 초대교인들의 ‘성서신앙’ - 이덕주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성서공회의 기본 사역인 성서 번역과 출판과 반포 사업이 지닌 신학적 의미는 실로 크다. 성서 번역이나 출판은 단순한 경전 번역이나 책 만들기가 아니다. 성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짐으로 말씀 속에 담긴 복음은 새로운 문화의 토양 속에 뿌리를 내린다. 즉 토착 언어로 번역된 말씀을 읽은 토착민들이 깨달은 진리를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와 문화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환경에서 실천함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요 1:14)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와 그 문화는 ‘낯선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from the alien to the familiar) 바뀌는데 그것을 복음의 토착화(土着化, indigenization)라 부른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이러한 복음의 토착화, 말씀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는데 성서 번역과 인쇄, 그리고 반포 사역이 이루어지는 ‘말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토착교인들의 ‘말씀 공부’ 모임인 사경회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1. 사경회와 부흥운동한국교회의 사경회(査經會)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사경회 강사나 수강생들이 모두 교재인 한글 성서를 지녀야 한다는 사경회 특수성을 감안할 때 쪽복음 형태로나마 국내 번역본들이 여러 종류로 다량 인쇄되기 시작한 1896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사경회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교인들의 사경회에 대한 언급으로는 1897년 8월 말 서울에서 개최된 장로회 연합공의회에서 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 M. Baird)가 선교 계획을 보고하는 가운데 “평양으로 리샤고  평양에 사경회를 쥬쟝고”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1897년 이전 평양지역에서 사경회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이듬해(1898년) 6월과 7월 평양과 부산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대한 기사가 「그리스도신문」에 실렸다. “지나간 륙월과 칠월 두  동안을 평양교회에셔 사경회 하엿대 여러분 목들이 셩경에 깁흔 을 교우들의게 힘써 만히 쳣더라.  부산셔도 지나간 칠월에 사경회 엿대 목 아담씨가 십여명 교우들의게 누가복음  권을 다 셰히 공부식혓더라.”평양 사경회에서 두 달 동안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산에서는 한 달 동안 누가복음 전체를 배웠다. 이처럼 평양과 부산에서 개최된 사경회가 장로교회의 경우라면 감리교회의 경우는 1899년 1월 개최된 평양 사경회에 대한 보고가 남아 있다. “우리 교회에 유익 것은 셩경을 공부이라. 이럼으로 지  음력 十二월 二十일 위시여 샤경회를 셜시엿 각쳐 교우들과 본교회 형뎨 즁 공부를 힘쓰 사 십여인이 목 에 모히여 졔졔히 깃분 으로 하님 긔도고 아 아홉시로 열시지 로마인셔 공부고 오후 두시로 네시지 요한 一二三셔와 디도셔와 아각셔를 공부여   동안에 하님의 묵우신 은혜와 목의 셩실히 침으로 형뎨와 들이  눈을 열어 지식의 유익을 엇고 각각 밋 이 더욱 굿건케 엿오니 감다.” 역시 한 달 동안 40여 명이 모여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방금 인쇄되어 나온 여러 종류 사도서신을 갖고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경회가 신약성서 전체가 인쇄되어 나온 1900년 이후 더욱 활성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음은 평양에서 사역하던 미감리회 여선교사 노블(M. K. Noble) 부인이 1903년 가을에 개최할 여자사경회를 소개하면서 쓴 글이다. “이젼에 셩경이 부죡 에 누구던지 셩경을 시 동안만 보고져 여도 돈 십원을 내여야 보왓거니와 지금은 누구던지 셩경을 사셔 긔 집에 두고 늘 공부 수 잇 거 감사 일이요  사경회 치 거 반 열심케 하고 오도록 셩경공부 션들이 갑업시 오 이에게 칠 터이니 이 밋 사의 일치 못 맛당 됴흔 긔회니라.”누구든 원하면 성서를 구해 읽을 수 있게 된 교회 환경이 성경공부와 사경회를 활성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블 부인은 성서를 ‘아버지 편지’로, 사경회를 ‘아버지 편지 보러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셩경은 하님이 우리의게 주신 편지니 우리의게 주신거 다 열심히 공부고 십흘 거시오 우리 아바지의 편지와 경계 아모 이던지 치 이가 잇면 시작기 젼 두어날 동안에 사경회 올나가 길노 큰 무리가 늘 득히 단닐 터이니 그런고로 다 셩이 뭇기 무 일노 이러케 모혀가뇨 면 다 열심히 답하기 예비지니 우리 아바지 편지보러 가노라 내가 여호와의 뎐에 영원이 살이로다 며(시 二十三O六 ) 우리와 치 모든 사이 다 졉을 밧을 터이니 우리 치 갑셰다 우리와  하님 압흐로 나갑셰다 지니라.”이렇게 사경회가 활성화되면서 그 형태와 내용도 다양해졌다. 처음엔 성서 공부만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공부 외에 기독교 교리와 교인생활에 관한 기초 과정도 삽입했고 오후에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도 벌이고 저녁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경회 기간도 1-2주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교회 단위로 실시하기도 하고 지역 내 여러 교회가 연합해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연합 사경회를 ‘도사경회’(都査經會)라 불렀는데 평양에서 열린 도사경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구체적인 증언을 평양노회 역사기록(1925년)에서 읽을 수 있다. “[1907년] 一月 六日브터 平壤城에셔 平南都査經會를 開고 八所로 分야 工夫며 各學校에셔도 聖神밧기 爲야 祈禱會를 開엿 金燦星이 崇德學校에셔 祈禱會를 引導며 路可福音 十五章에 蕩子悔改比喩로 講道 時 三百餘名 小學生 一同이 大聲痛哭며 或昏倒氣節며 罪를 自服 所聞이 卽刻으로 査經會 各所에 遍傳니라. 時에 吉善宙가 第八所에셔 聖神要理를 敎授더니 聖神이 會衆에 臨 蔡廷敏이 大聲痛哭며 罪를 自服기 始作야 八所 一同이 一時 悔罪痛哭엿스며 每夜에 李吉咸 宣敎師의 引導로 禮拜 中 忽然히 急 바람이 臨 듯 더니 이윽고 聖神이 降臨매 滿堂聽衆이 放聲痛哭며 各其起立야 罪를 自服니 哭聲과 自服聲을 分辨키 難더라.” 그리고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토착교인들의 사경회와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이 더욱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토착교인들의 사경회 열정은 대단했다. 그 열정은 다름 아닌 ‘성서를 배우려는’ 학생의 열정이었다.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스왈른(W. L. Swallen)의 증언이다. “한국인들은 성서 공부에 열정적인 학생들이다. 집에서도 공부하고 초등학교, 특수학교, 중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에서도 공부하고 사경회와 성경학원, 신학교에서도 공부한다.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려는 이들의 욕구를 충분하게 채워준 적이 없다. 성서 공부에 대한 열정은 남성 못지않게 여성들도 대단하여 어떤 이들은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삼일씩 걸어오기도 한다.”선교사들은 이불과 양식을 짊어지고 이삼일 걸려 수백 리 길을 걸어서 사경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보며 감탄하였다. 같은 시기 언더우드의 증언이다.“한국 교인들은 며칠씩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웬만한 어려움은 거뜬히 견뎌 내고 있으며 250명에서 많을 때는 1,180명씩 모여 열흘에서 열나흘 동안 성서를 배운다. 이 같은 대규모 사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소규모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북부 지역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1년 동안 이 같은 소규모 사경회를 192회 실시해서 연인원 1만여 명을 기록하였다.”사경회가 부흥운동의 요인이 되었듯이 다시 사경회는 교회 부흥의 요인이 되었다. 사경회와 교회 부흥이 떼어놓을 수 없는 상생(相生) 관계를 맺고 있음은 마펫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성서가 복음화의 제일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요인이 되어왔다. 한국에서 성서는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성서 지식으로 충만하여 그 능력과 영성과 기도 신앙과 관대함을 발휘하고 있다. 성서 공부와 사경회가 한국 교회 성장에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설교가 예배 정신을 개발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성서야말로 한국 교회의 신앙과 지식의 기반으로서 영적 생활을 추구해나가는 데 필요한 영감을 공급해주고 있다.”같은 평양에서 활동했던 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W. N. Blair)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한국 선교사업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사경회 제도이다. 개교회별로 매년 1주일 혹은 그 이상 모여 성서를 배운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 한국 교인들은 그 때만 되면 모든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오직 성서 공부와 기도에만 전념한다. 이같이 성서 공부에만 전념한 결과 교회전체가 단합되어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부흥이 가능케 되었다. 이 점에서만큼은 미국도 한국을 본받아 부흥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블레어는 한국교회 사경회를 유대인들의 ‘유월절’(passover) 문화에 비유하였다. 그처럼 사경회는 1907년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축제’, ‘절기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구약성서도 번역되어 ‘성경 전체’를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된 1911년 이후에 그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평북 선천에서 활동하던 북장로회 선교사 로스(C. Ross)의 증언이다. “여러 사람의 수고로 신약은 이미 수년 전에 번역되었지만 구약이 한글로 번역된 것, 즉 성서 전체가 번역된 것은 불과 작년[1910년]의 일이다. 지금까지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학자들만 구약 본문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일반 평민들이 처음으로 성서 전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년은 기념비적인 해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사경회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는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학자들의 도움으로 [구약 본문을] 이 나라 말로 번역해 [사경회 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서 전체에서 보다 폭넓게 사경회 교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지역 선교부 선교사든, 다른 지역에서 파견 나온 선교사든, 토착교인이든 누구나 사경회 교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설교자료

[해외] 첫 성경, 그 설렘

본 공회는 지난 2014년 7월에 멕시코성서공회의 요청으로 촐(Chol)어 신약전서 7,000부 를 제작하여 기증하였습니다. 이 성서의 봉헌예식은 멕시코성서공회의 주관으로 10월 10일 부터 12일까지 총 3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첫째 날 1,000명, 둘째 날 2,000명, 셋째 날에는 500명 정도의 촐 부족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봉헌식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였습 니다. 특별히 멕시코성서공회 총무는 본 공회와 한국교회 후원자들에게 촐어 신약전서의 기 증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말로 말씀하십니다. 멕시코의 툼발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촐 부족은 인구가 약 3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가 기독교인이고, 2천여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국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촐 부족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 운 스페인어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제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촐(Chol)어 로 된 성서를 읽으면서 말씀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료

[해외] 남수단 실룩어 성경 봉헌식 1년 후

말라칼(Malakal)은 아프리카 남수단 나일강 상류에 있는 도시이다. 2013년 5월 말라칼에서는 찬양과 환호성이 가득했다. 바로 간절히 바라던 첫 ‘실룩어 성경’의 봉헌식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지난해 실룩어 성경 봉헌식에 참석했던 엘리자베스 에드웍 와이는, 22년 긴 내전을 겪은 남수단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이 성경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꽤 긴 시간 동안 아버지를 살해한 이를 증오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상처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뿐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 실룩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또 지난 아픈 일을 잊고 털고 일어나는 데 큰 힘이 됩니다.”하지만 말라칼은 이제 더 이상 환호성과 찬양이 들리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말라칼을 비롯한 남수단 몇몇 곳에서 일어난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의 격렬한 내전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성경 봉헌식을 한 지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은 2013년 12월에 일어난 일이다.남수단성서공회의 총무 에드워드 카지보라(Edward Kajivora) 박사는 지금 말라칼을 비롯해 남수단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슬퍼하였다. 지금과 같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자기들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난 중에도 생명을 주는 ‘실룩어 성경’남수단의 내전으로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이 일로 실룩 부족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바로 지난해 그들이 받은 ‘실룩어 성경’이 내전을 피해 난민촌이나 정착촌 등으로 도망간 실룩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로다(Roda)는 지금과 같은 힘든 시기에 실룩 성경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와 양식이 된다고 말한다.로다는 실룩어 성경 번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말라칼에 있던 그녀 또한 여느 실룩 부족 사람들처럼 이 격렬한 싸움에 휘말렸다. 거리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로다는 유엔(UN) 베이스 캠프로 도망쳤다.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고, 몸이 아파서 결국 주바(Juba)로 후송되었다.밤낮으로 성경을 읽는 실룩 사람들“실룩 사람들 중에 작년 기증식 때 성경을 받은 사람들은 밤낮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유엔 캠프에 있는 실룩 사람들이 쓰는 성경책은 너무 많이 봐서 닳아 없어질 지경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도 와서 이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분명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오토 그와도(Otto Gwado)는 또 다른 실룩어 성경의 번역자이고 성서공회의 직원이다. 그의 가족 또한 힘든 일을 겪었다. 그가 성서공회 일을 시작하려고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으로 먼저 나와 집을 알아보던 중 내전이 심해졌고, 말라칼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숲 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바까지 오는데 한 달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그의 온 가족에게 그 한 달은 참으로 힘겹고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많은 남수단 사람들처럼, 실룩 가족들도 이 내전 때문에 깊은 슬픔과 상처 그리고 불안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카지보라 총무는 말을 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듣기로 많은 실룩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가면서 성경책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정착지인 와우 실룩이나 디탕, 룰 그리고 코톡과 같은 곳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슬픔, 트라우마, 그리고 불안감비록 유엔이 저희가 캠프에 성경을 ‘보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캠프에 들어올 때 성경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만은 성경을 갖고 있어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실룩 사람들에게 성경이 가장 필요한 때에 성경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실룩어 성경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전쟁 기간에는 필요로 하는 지역에 무언가를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부활절에 이루어진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내전 중에도, 남수단성서공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성서공회가 있는 주바 지역이 사람들이 다니기에 안전하지 않고 재정적인 궁핍함 때문에 성경책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공회는 여전히 성서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도 그들이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성서공회는 2014년 부활절 기간 동안, 남수단 서편 국경지역인 에조(Ezo)에서 치료 사업을 시작했다.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이 사업 책임자인 클레로(Klero) 목사님은 아프리카에서 악명 높은 LRA라는 우간다 반군에게 고통당한 잔드(Zande) 사람들과 두 주간을 보냈던 분입니다. 이 지역은 또 다른 인접 분쟁지역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경에서 겨우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치료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LRA가 국경에 나타나 남수단 군에게 우리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라고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사진 > 기도하는 트라우마 치료 워크숍 참가자들에조의 부활주일<사진 > 부활주일 퍼레이드클레로 목사님은 부활절 기간에 치료 모임을 진행하면서 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담긴 사랑과 치료의 메세지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참 기뻤다고 고백했다. 참석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까지 용서하신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은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우리나라에 평화가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는 말을 클레로 목사님은 전했다.철저히 분단된 나라남수단은 정치적, 종족적으로 철저히 나누어졌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카지보라 총무는 말한다. “정부는 이번 전쟁이 종족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실제는 다릅니다. 이 싸움은 사실 크게는 딩카스(Dinkas)와 뉴어스(Nuers) 종족 사이의 일입니다. 이 두 종족 사이의 증오심은 상당히 깊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유엔의 난민캠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또한 정부군와 반란군은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군사로 쓰려고 모집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여기에 쉽게 끌려갑니다. 사람들이 쓰던 오래된 창과 활 대신 이젠 총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카지보라 총무는 마지막으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의 소망은 주님 한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서공회는 많은 남수단 사람들과 함께 끊임없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출처: 세계성서공회연합회)

설교자료

[해외] 에티오피아 그룸 페일(Groum Pale)의 고백

스무 살 에티오피아 청년 그룸 페일(Groum Pale)은 거리의 아이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배고픔과 두려움, 그리고 좌절의 연속이다. 오늘도 이 헌신적인 기독교 청년은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 지역에서 집을 잃고 떠도는 많은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눈다.지금 청년들과 아이들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암하릭어 성경을 읽고 있는 그룸을 보면, 늘 겁에 질려 있고 굶주려 있던 11년 전의 그룸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룸의 삶이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룸은 이웃 기독교인들의 사랑의 결실이다. 그 사랑 안에서 그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가 되었다.그룸과 그의 여동생의 부모님은 일찍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로 그룸 남매는 집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며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음식을 얻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걸핏하면 병에 걸렸고, 기생충에 위가 뒤틀리기도 했고,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렸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다.그룸이 아홉 살이 되던 해, ‘한나고아원’ 식구들을 만났다. 한나고아원은 집 없이 배회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단체로, 기독교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룸 남매의 건강을 챙겨줄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룸은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어린 시절을 길거리에서 보내면서 정말 끔찍한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제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거리의 아이로 자라면, 배우는 것이라고는, 싸움을 잘 하는 것과 모두를 의심하며 사는 것, 이 두 가지뿐입니다.”이런 그룸이 1년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그리고 굳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모두 에티오피아성서공회에서 받은 성경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었다.그룸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경 속에 담긴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낮에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밤이 되면 잠이 들기 전에 낮에 읽고 들은 성경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면 성경에 담긴 이야기 하나하나가 마치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면 그 말씀들이 제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메아리칩니다. 저에게 그 어떤 것보다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성경 말씀 낭송“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제 삶이 변하고 있습니다. 저나 제 친구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함께 읽고 듣던 성경 말씀을 함께 큰 소리로 낭송하며 그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합니다.”이제, 그룸은 학교 졸업반이다. 게다가 그 반에서 우등생이다. 그룸은 대학에 진학하여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에티오피아가 더 나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이 모든 것은 제가 특별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저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그 무언가가 없어도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분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기증 받은 성경 자료들학교 수업을 마치면 그룸은 거의 매일 거리의 아이들이나 고아원의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자리에 있다. 에티오피아성서공회에서 제공한 오디오 성경 기계들이 있었지만, 도난을 당하기도 했고, 고장이 나서 다른 나라에 고치러 보냈다. 그래서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성경뿐이다. 그룸은 그 성경을 아이들에게 직접 읽어주곤 한다.“제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은 제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읽었던 말씀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능한 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던 구절입니다. 이제 그 말씀이 저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그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그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씩 가까이 오는 것을 본다.(출처: 영국성서공회)

게시물 검색
상단으로